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묵시록이 내 더러운 방을 죽이고 있는 동안 나는 사건 현장을 떠나있기로 결심했다. 괜히
목격자가 되면 귀찮을 테니까. 거기다 본의 아니게 공범이 된다면, 그건 더더욱 귀찮은 일
이다. 나는 방바닥과 책상 주변에 멋대로 널려있는 쓰레기들과 물건들을 - 이미 이 두 집단
은 서로 구별하기가 힘들어졌다 - 치우는 묵시록의 등을 곁눈질로 살피며 살며시 방을 빠져
나왔다. 사실 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. 그는 어느 순간부터, 그가 내 방을
치울 때 내가 같이 도와 치울 것이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기로 진작 결심했을 것이다. 그
게 그의 성격이었다. 그런 식으로 파괴의 화신들은, 불살라먹을 것들이 떨어질 때면 스스로
가 가진 것들을 하나 둘 불살라먹고는 한다. 물론, 값 싼 것 우선으로. 내 호의에 대한 기대가
그의 입 속에 들어간 시점을 생각해보면, 내 호의라는 건 정말 싸구려였다.
싸구려. 싸고, 구리다는 것이다. 생각해보면 도대체 이 세상에는 싸구려가 얼마나 많은가. 아
버지와 어머니가 이 집에 같이 살고 있을 때는 그저 ‘싼’ 것이었던 이 길쭉한 거실 소파도, 지
금은 ‘싸구려’가 되었다. 그럴 수밖에 없는 게, 일단 이건 싸다. 그리고 진짜 구리다. 달리 구리
다는 게 아니고, 진짜 냄새가 …… 구리다. 어쩌면 내 몸에서 나는 냄새도 이런 냄새가 아닐까.
묵시록이 얘기하는 그 썩은 내가 이런 냄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이 소파가 남 같지
가 않았다. 한쪽 팔걸이 발을 올리고 반대쪽 팔걸이에 얼굴을 댄 채로 눕자, 구린내가 콧구멍
가장자리부터 은근하게 엄습해온다. 연륜이 느껴지는, 구린내다. 꼭 된장 같다. 메주 같기도 하
고. 이참에 거실에 있는 가구들의 냄새를 전부 맡아본다. 전부 구리다. 부모님이 검소하지만 않
았어도 이들은 싸구려는 안 되었을 텐데. 여러모로, 검소는 죄악이다. 나는 개기름에 떡이 진 머
리를 긁적인다. 확실히 내 몸에서도 비슷한 냄새가 난다. 이 집 물건들은 나와 함께 숙성되고 있
었던 것일까. 어쩌면, 썩어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.
된장찌개가, 먹고 싶다.
묵시록의 목소리가 방 쪽에서 들려온다.
아, 씨. 형, 뭔 놈의 휴지를 이렇게 많이 써요?
야, 나 된장찌개 끓여주라.
좆 까시구요. 휴지를 대체 왜 이렇게 많이 쓰시는 건데요.
된장찌개 먹고 싶다니까.
귀는 이미 끓여 먹은 것 같은데 그냥 참으세요. 저 된장찌개 잘 못 끓여요. 근데 진짜 감기라도 걸렸
어요? 무슨 일부러 쓰레기 만들 생각으로 그런 건 아닐 테고. 아니, 진짜 그런 건가. 휴지가 그냥 산
지사방에 ……
좆 까느라 그렇게 썼다, 왜. 개새야, 그건 둘째 치고 나 된장찌개 끓여달라고.
좆을 깠다구요?
그래.
묵시록은 뭔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방금 주운 휴지조각을 든 채 알쏭달쏭한 표정이 된다. 그러다
문득 그 휴지에서 밤꽃 냄새가 난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. 그는 황급하게 휴지를 휴지통에 쑤셔 박고
는 이맛살을 구기며 화장실에 들어가서 손을 씻는다. 나는 세면대에 연신 손을 비비고 있는 놈의 등짝
에다가 대고 소리를 친다.
야, 된장찌개.
저 된장찌개 아니에요.
그게 아니고, 된장찌개 끓여달라고.
아, 진짜. 알았어요.
나는 어린애처럼 기뻐한다. 스스로가 병신 같다.
형 나이가 몇 개인데, 아직도 오른손이랑 못 헤어졌어요?
결혼하고도 오른손이랑 바람피우는 남자도 수두룩한데, 뭐.
진짜요?
어.
대체 왜요?
글쎄다. 마누라가 질리나 보지.
남자들이 왜 결혼하고 나서도 마스터베이션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일까. 글쎄, 아무래도 대리만족이라는
것에 너무 길들여져서 그런 게 아닐까. 어쩌면 첩을 두고 싶은 은밀한 욕망의 발현일 수도 있고. 재미없
는 얘기야 하려면 끝이 없다. 그래도 그나마 대리만족에 길들여졌다는 얘기가 마음에 든다. 대리만족으
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다보니 막상 진정한 만족을 만나도 그저 두려운 것이다. 쉽게 말하면, 모성회귀
본능이다. 알껍데기를 깨고 나와 빛을 본 뒤에도 알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이다. 햇살이 너무 따가
우니까.
●
묵시록은 솔직한 놈이었다. 그의 된장찌개는 정말 맛이 없었다. 그러니까, 맛이, 없었다. 없었다. 색깔은
멀쩡한데 어떻게 맛은 없을 수 있는지. 그는 똥으로 된장찌개를 끓인 것이 아닐까. 하지만 난 그 똥찌개
를 다 먹고야 말았다. 끓여달라고 보챌 때는 언제고 안 처먹는 건 또 뭐냐고 핀잔 들을 것이 겁나서 다 먹
은 건 아니었다. 제주도에 있다는 똥 먹는 돼지의 기분이야 더욱 관심이 없었다. 그저, 계속 먹다보면 맛
이 날까 해서 다 먹었다. 사람이 지독하게 한가해지다보면, 시체와의 차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별 짓을
다한다. 이런 것도 그러한 활동 중에 하나였다. 인생 자체가 쓸데없어지다보면 쓸데없는 것들에 대해 많
은 관용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.
그보다는 무감각해진 거 아니에요?
묵시록이 끼어든다. 나는 손을 좌우로 흔들며 그의 말을 부정한다.
아니야, 이건 관용이야.
관용이요? 된장 얘기하는데 무슨 관용이에요? 먹고 맛 때문에 토할 바에야 아예 맛을 안 느끼는, 뭐 그런
거란 얘기에요?
아, 된장 얘기였구나.
아니, 된장찌개는 진짜 맛이 없던데. 꼭 갈색 물감을 탄 물을 마시는 느낌이었어.
형만 그래요. 분명 된장에 …
된장(집 된장 반, 마트에서 파는 된장 반. 없으면 사온 거 그냥), 마른 다시마(다시다 아님!), 국멸치 대 여섯
개(손가락 굵기 만한 큰 거 아시죠?), 두부 2/3컵, 애호박(다른 호박은 단맛이 날 수 있으므로 비추)2/3컵, 청
양고추 한개(향도 좋고 맛도 칼칼하니 좋아요), 표고버섯 작은 거 한개(팽이버섯도 쫄깃한 맛이 좋긴 한데 향
과 국물 맛이 좋아지는 데는 표고가 제일), 고춧가루 1티스푼(넣어도 되고 안 넣어도 되나 눈에 보기에도 맛
있어 보이고 약간에 식감 차이는 남), 쪽파나 대파 쫑쫑 썱어서 반 컵, 마늘은 안 넣어도 상관없음.
묵시록은 인터넷 사이트*에서 찾은 된장찌개 레시피를 내게 들이민다. 군데군데 보이는 오타가 은근히 신경
쓰였다. 그나저나 썱는다는 건 뭐지?
이렇게 넣었다고요.
즉 네 요지는, 병신인 건 네 된장찌개가 아닌 내 혀이다?
이제 와서 혀가 좀 병신이라고 해서 아쉬울 게 있어요?
물론 없지만, 이상하잖아. 오늘 아침에 라면 먹었을 때도 분명 맛이 느껴졌는데. 갑자기 미맹이 됐다니. 그리고
미맹이라는 게 정말 미각을 통째로 잃어버리거나 하는 그런 것도 아니잖아.
그러네요. 잠깐만 기다려 봐요. 혹시 된장찌개만 맛이 없었어요?
어? 글쎄. 밥이랑 된장 밖에 안 먹어서.
묵시록은 또다시 그 특유의 한숨을 내뱉는다. 그는 냉장고를 뒤져서 김치와 단무지를 꺼낸다. 얼마 전에 옆집에서
내가 가엾다고 준 명란젓은 상했는지 싱크대에 버려지고 통만 남는다. 그는 김치와 단무지를 한 조각씩 덜어서 가
져올 셈인지 찬장에서 식접시를 꺼낸다.
설거지 귀찮아. 그냥 통째로 가져와.
그리하여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김치와 단무지를 시식하게 되었다. 나는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내 입에 집어넣는
다. 차가운 김치의 감촉이 혀가 시원하다. 근데 짜지도, 맵지도, 시지도 않다. 차갑다. 배추처럼 질긴 얼음을 먹는 것
만 같다. 순간 역겨운 기분이 들어 나는 김치를 삼키지도 않고 뱉어버린다.
어때요?
이, 이런 씨발.
맛, 안 나요?
안 나. 하나도.
이번에는 단무지 차례다. 단무지도 마찬가지였다. 세상처럼 차갑기만 하다. 정말 나는 미각을 잃은 것이다. 뭔가 장애
를 갖게 되면 굉장히 처참한 기분이 들 것만 같았는데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다. 예전에 드라마에서 봤던, 자신이 생
식능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며 울부짖던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. 자신의 두 … 그것을 기능 장애에 빠트
린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며 비탄에 빠지던 남자의 모습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는데, 정작 나는 그처럼
“내가 미맹이라니!”
하고 소리치지는 못했다. 그럴 기분이 도저히 안 되었다.
어떻게 하지.
내일 병원이나 가보세요. 전 그만 가볼게요.
아, 그래. 가라. 다시는 오지 말고.
묵시록은 가운데 손가락 외에 나머지 손가락을 접어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. 문이 열렸다가, 닫힌다. 자동 잠금
장치가 삐리릭, 소리를 낸다. 더 이상 그 소리가 욕처럼 들리지는 않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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* : 네이버에서 참고했습니다.